[언론보도]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빈집·깨진 알만 그리는 ‘위탁아동 상처’ 살뜰히 치유(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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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조회수 : 6,783회
작성일 : 1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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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를 그려보라는 주문에 아이는 알 몇 개를 덩그러니 그려 넣었다. 아이의 그림에는 새 둥도 없고 알들을 품어주는 어미 새도 없다. 아이는 알이 둥지가 아닌 마트의 달걀 판매대에 있다고 대답했다. 알에서 곧 태어날 새끼 새의 기분은 어떠냐는 질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고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아이가 그려놓은 알 중 하나는 반쯤 깨져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불안하고 슬픈 눈빛의 새끼 새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윤진(35) 교사가 지난해 10월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는 중학생 이현정(가명·14) 양의 미술 심리 치료 수업을 한 뒤 기록한 일지 중 일부다.
이 교사는 경기도 일대 위탁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미술 심리 치료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친부모에게서 버림받아 친척이나 위탁 부모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아이들은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사연들을 품고 힘겹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새 둥지 그림을 그린 현정이의 경우도 부모의 이혼으로 세 살 되던 해부터 10여 년 동안 친척 집 등을 떠돌며 생활하다 지난해 위탁 부모를 만났다.
현정이는 자라는 동안 쌓인 마음의 상처들 때문인지 첫 수업 시간에는 이 교사와 눈을 마주치지도, 웃지도, 묻거나 대답하지도 않았다. 첫 수업 시간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위탁 가정의 학생들을 대하는 게 일상인 이 교사에게 현정이의 첫 수업 태도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현정이는 이 교사가 스케치북을 건네자 아무 말 없이 2시간 동안 집중해서 이것저것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정이는 표정이 없는 긴 머리의 여자, 빈집, 잘린 손, 물에 빠진 사람으로 스케치북을 채워 나갔다.
이 교사는 하나같이 어두운 분위기의 사물 등으로 채워진 현정이의 그림을 보면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아이다.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 교사는 현정이가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안정감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고려해 부드러운 섬유로 수면 양말을 만들고, 촉감이 좋은 점토를 빚는 수업을 했다. 이집저집을 떠돌며 불안감을 느꼈을 현정이가, 갖고 싶은 집을 상자로 만드는 수업도 진행했다. 좀처럼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현정이를 위해 잡지를 찢어 입고 싶은 옷과 먹고 싶은 음식으로 도화지를 채우는 콜라주(인쇄물을 잘라붙이는 미술 기법)도 했다. 또 그는 ‘꿈도 희망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현정이에게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는 꿈을 갖게 해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견학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현정이는 한층 밝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마지막 수업에서 현정이는 꽁꽁 언 손으로 집에 도착한 이 교사에게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말없이 건넸다.
이 교사는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현정이처럼 치료 수업을 받으면서 호전되는 학생들을 보면 봉사를 멈출 수가 없다. 그의 수첩에는 여전히 일주일 치 봉사 활동 스케줄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는 “월요일은 안산, 화요일은 광주, 수요일은 용인, 목요일은 수원, 금요일은 부천의 위탁 가정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업한다”며 “차를 서너 번 갈아타고 가는 데만 꼬박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위탁 가정도 있지만 일주일 동안 수업 날만 기다리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먼 거리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생활비를 아껴 마련한 돈으로 학생들의 미술 치료 준비물도 직접 준비한다. 학생들을 만나는 날에는 폭우나 폭설이 와도 어김없이 양손 가득 미술 치료 준비물이 가득 들려 있다.
이 교사는 지난 2006년부터 4년 동안 울산의 한 애니메이션 고교에서 미술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미술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한 학생이 자살을 연상시키는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을 보고 심리 치료가 필요한 학생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이 교사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차의과학대 미술치료대학원에 진학했다.
올해 졸업반인 이 교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미술 치료와 심리 상담을 동시에 하는 게 꿈이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힘들고 지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 항상 배우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